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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김형석(연세대학교 명예교수)

역사의 뒤안길에서

빛은 동양에서부터라는 말이 있었다. 상고시대와 고대사회에 있어서는 아시아를 비롯한 동방나라들이 문화적으로 앞서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다가 중세기에 이르러서는 제각기 대등한 문화권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세계 역사가 근대사회로 접어들면서 서구 사회가 근대화 과정을 창출, 육성함으로 세계 무대의 주도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인도사회는 근대화의 과정을 밟지 못했기 때문에 후진사회의 울타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으며,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사회도 뒤늦게 근대화 과정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개발도상국가들의 위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서구사회에서 근대역사를 처음 개척하고 영도한 사회는 유럽 남쪽을 차지하는 라틴계열의 민족과 문화였다. 그러나 역사의 무대가 점차로 북진하면서 앵글로색슨사회와 게르만문화가 비중 크게 등단하기 시작했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선생님들은 필요한 외국어는 셋이라고 말했다. 흔히 말하는 영어·독일어·불어였다. 외교관이 되거나 예술분야로 진출한 사람은 불어를, 자연과학과 의학·약학을 전공할 이는 독일어를, 비즈니스에 뜻이 있는 학생은 영어가 필요하다는 말은 누구나 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20세기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영어문화권이 세계를 좌우하게 되었고, 지금은 명실공히 앵글로색슨의 영어문화권이 역사를 주도하기에 이르렀다. 단지 그 중심무대가 영국에서 아메리카로 옮겨졌을 뿐이다. 앵글로아메리칸사회로 발전한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사람들은 앵글로색슨의 민족성이 우수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속단하기 쉽다. 그러나 민족의 우열성보다 중요한 것은 어느 민족이 더 선하고 강한 정신력을 갖추고 있는가 함을 물어야 한다. 건설적인 사고 방식과 창조적인 가치관을 지닌 민족과 사회가 역사를 선도해 갈 능력을 차지하는 것이 역사의 길인 까닭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미국사회를 이끌어 가는 사고방식과 가치관은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그 정신력이 다민족사회를 어떤 방법으로 주도해 가고 있는가.

그 역사적 원천은 5세기쯤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의 영국 정신계는 대륙의 이성 중심의 합리주의보다도 그것들을 포함하는 삶 자체를 중심 삼는 경험주의를 개척해 나갔다. 사람들은 수학·기하학·논리학적인 연역적 사고보다 심리학을 가미시킨 귀납적 사고를 택했다고 지적한다.

이 당시의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에서 우열을 가릴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이성주의와 전인간적인 사고에서는 구별될 수 있었고, 그것이 사회적 발전에 있어서는 현실에 입각한 경험주의가 더 많은 타당성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합리주의적 사고가 원칙과 원리에 현실을 맞추어 가는데 비해 경험주의는 현실 속에서 어떤 원리와 원칙을 찾아 그 현실을 더 높혀 가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그 뒤, 프랑스에서는 실증주의 이론을 전개시켰고, 독일에서는 마르크스주의가 탄생했으나 영국은 공리주의 사상을 개발, 발전시켜 나갔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정치에 있어서는 의회민주주의가 되었고, 경제에서는 복지정책이 정착하게 된 것이다. 그 중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의 심판을 받았으며 실증주의는 사회과학적 이론으로 남게 되었으나, 공리주의는 혁명보다는 점진적인 변화와 개선을 통해 사회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아메리카는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아 그것을 다시 실용주의적 가치관과 방법으로 발전시켜 오늘의 미국을 건설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경험주의의 뿌리에서 공리정신의 줄기가 자라고 실용주의의 결실을 얻게 된 것이 앵글로아메리칸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줄기찬 정신적 주체성이 다른 사회들을 앞지르게 되었고 다민족으로 형성된 아메리카의 정신적 정체성을 굳히게 된 것이다. 그 정신적 가치와 윤리성이 살아 있기에 미국이 세계의 비중 큰 중심무대를 차지하기에 이른 것이다.

우리는 어떤 길을 걸어 왔는가.

그렇다면 우리 민족은 어떤 역사의 과정을 밟아 왔는가.

조선왕조가 시작되면서 우리는 중국에서 전래한 유교를 중심 가치관으로 받아 들였고, 학문과 사상의 중심과제는 주자학이 바탕을 이루었다. 그런데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주자학은 형식논리에 속한다. 그리고 우리가 수용한 유교의 정신은 인간적 삶의 도리보다는 교조주의를 종교적 성격화 시켰는가 하면, 공자 등의 교훈을 선하고 아름다운 인간관계의 뜻으로 발전시키기보다는 형식과 규례로 교리화시키는 일에 치우쳤다.

이러한 형식논리와 교조주의가 합쳐져 형성된 사고방식이 사물에 대한 양분법 즉 흑백논리가 된 것이다. 나와 우리는 백까지 옳으며 너와 상대방은 영이라는 양극논리였던 것이다. 사실 흑과 백은 이론으로는 가능하나 실재하지는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중간의 회색일 뿐이다. 밝은 회색과 어두운 회색이 있을 뿐이다.

경험론자들은 삶의 현실이나 사회적 현상을 취급할 때 현존하는 중간색을 문제 삼았으나 우리는 없는 흑백이론으로 만사를 처리했던 것이다. 우리가 증오하는 회색분자 개념이나 50보 100보 차이일 뿐이라는 사고가 그것을 말한다. 그 결과가 500년 동안의 파벌싸움을 유도해 왔고, 지금도 여야의 정치적 대립이나 노사분규의 양상이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와 다른 것은 용납하지 못하며 우리에게 반론을 제기하는 편은 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다. 남북관계도 그런 범주를 넘어서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앵글로색슨사회 사람들이 얼마나 흑백논리적 사고를 극복하고 있으며 혁명보다는 개혁, 개혁보다는 개선을 줄기차게 추구해 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 크게 본다면 흑백논리를 택한 사회(공산주의도 그 대표적인 예이나)는 모순과 투쟁 그리고 혁명을 반복했고, 합리주의 사회는 토론과 개혁을 선택하는 반면 경험주의 사회에서는 대화를 통한 개관적 가치를 모색하는데 그 특성이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이러한 흑백논리가 우리 선조들에게는 정치권력의 독점의욕으로 전개되면서 탄생한 것이 본능적인 이기집단, 우리가 가장 우려하고 있는 집단이기주의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조선왕조는 왕권을 중심 삼는 권력이 유일한 지배층의 목표였기 때문에 권력집단을 위한 세력다툼은 자취를 감추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집단이기주의는 우리 사회를 폐쇄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가면서도 내분과 싸움을 유발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우리가 먼저 지적한 영국의 공리주의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추구한 윤리성과 공동선의 가치관을 확장시켜 갔음에 비한다면 집단이기주의는 선진사회를 지향하는 가치관에서 볼 때 암적인 사회악일 수밖에 없다. 이기적인 발상과 집단이기주의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21세기 세계 무대에 등단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사적 상황 속에서 자란 우리 민족의 소수가 아메리카 사회에 이주하게 되었던 것이다. 약 반세기 동안 우리 선인들은 나와 가족을 위해 일해야 했다. 그러나 6·25를 계기로 이민의 수가 많아지면서 미국 사회에서 우리 민족의 위상을 확보하며 높여 가는 노력을 계속해 왔다. 그리고 아시아의 여러 국가의 선각자들이 그러했듯이 일부의 지도자들은 미국과 한국을 내왕 연결 지으면서 조국의 정신적 근대화를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우리는 그 대표적인 인물 중의 한 사람을 도산 안창호로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21세기를 맞이한 지금 우리는 미국 안에서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한다. 여러 민족이 아메리카에 머물고 있으나 앵글로아메리칸이 지니고 있는 사고방식과 가치관에 동참하면서도 앞서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아메리카의 지도층에 진입하고 있으며, 그들은 미국을 통해 세계무대에서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흑인 지도자들이 그 대표적인 예일 수 있다. 또 미국은 그러한 다원사회의 가능성을 세계 어느 사회보다도 수용하는 개방사회로 발전하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그 권리와 의무를 수행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을 뿐이다.

겨레의 선택과 진로를 위하여

지금 고국이나 미국사회에 거주하고 있는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해 무엇보다도 소망스러운 정신적 과제는 근대세계를 탄생시켜 준 과학적 사고와 그에 따르는 가치관을 수용·발전시키는 데 있다. 서구사회의 근대화는 과학의 힘으로 달성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의 척도가 곧 근대화의 수준을 말해주고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이점에 있어서 많이 뒤지고 있다. 서울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과학 및 과학정신이 어떤 것이냐고 물으면 대부분은 기계과학을 연상한다. 한국의 지식층 사람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면 많은 사람들은 자연과학을 생각한다. 그러나 아메리카의 대학이나 지식사회에서는 이미 그 단계를 넘어 사회과학을 떠올린다. 이상한 것은 한국에서 사회과학을 전공한 학생들도 사회생활을 할 때는 사회과학적 사고와 방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지식과 이론으로만 배웠을 뿐 생활의 방도로서 사회과학을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학적 사고의 빈곤이 동양 및 우리 민족의 약점이 되고 있는 것이다.

과학적 사고란 어떤 것인가. 우선 합리적 사고를 동반해야 한다. 합리적 사고가 과학을 증진시켰고 과학은 언제나 합리적 사고와 공존해 왔다. 우리 민족과 같이 정서적이며 감정을 생활의 밑바탕에 깔고 있는 사회에서는 이성적 사고가 감정적 요소를 제어함 지성이 기분과 정서를 좌우할 수 있는 사고를 쌓아올려야 한다. 특히 정치·경제 등의 사회생활에서는 법치사회가 필수적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과학적 사고를 한다는 것은 목적이나 이상의 설정과 더불어 과정과 방법을 중요시하는 사고이다. 방법이 없는 이상은 공상이 되며, 과정을 무시한 목적은 공수표에 지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양인의 의식구조에는 방법과 과정을 가벼이 여기거나 무시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사회과학적 사고와 연구가 빈곤하다. 이론적으로 학설을 도입했을 뿐 우리들 자신을 위한 사회과학이 수립되지 못하고 있다. 윤리와 도덕이 이론으로 겉돌고 있는 실정이다. 과학은 언제나 사실을 사실대로 파악함으로 진실을 찾아내고 그 진실에 입각해서 가치판단을 내리는 본성을 갖고 있다. 사실이 아닌 것은 진실이 아니다. 진실이 못되는 것은 과학적 사고의 대상이 못된다. 과학이 발달된 사회에서는 사실의 객관적 의미를 추구하며 얻어진 진실의 실용적 가치를 증대시켜 나가는 길을 택한다. 이러한 과학적 사고의 빈곤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결코 선진사회의 주역을 맡을 수는 없다.

사람들은 근대세계를 개척, 육성한 또 하나의 과제는 근대문화의 창조에 있었다고 지적한다.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을 잊지 못하는 것은 신앙보다는 이성의 가능성을 원했고 정신문화의 창출이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에서 발전했으나 모든 선진 국가들은 나름대로의 문예부흥을 성취시켰다. 정신적 문예부흥이 근대사회 건설의 필수조건이 되었던 것이다. 일본이 근대화에 앞장 선 것도 명치유신 때의 문예부흥 이후부터 였음을 보아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감스러운 것은 아메리카사회는 과학의 부산물인 기계와 기술에 힘입어 발달시킨 경제력과 그 핵심인 메커니즘이 지나치게 큰 비중을 차지하면서 인문분야가 소외당하고 있으며 실용적 가치가 확실하지 않거나 적은 정신 및 사상 분야는 영향력을 상실 당하고 있다. 물량적 가치와 정신적 가치의 균형이 깨지고 있는가 하면, 경제적 가치의 기준으로 정신적 가치가 평가받는 파행성이 줄어들지 않고 있다. 정신적 가치의 윤리성과 도덕적 규범이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세계무대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으며 아메리카사회에 동참하고 있는 한민족의 책임 또한 적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미래 세계를 위해 중요한 것은 휴머니즘의 새로운 인식과 그 가치관을 확고히 정립하는 일이다. 모든 것은 인간으로 발원하여 인간으로 환원하는 것이 역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인간목적관은 계속 강조되어 왔으나 항상 훼손 당해 온 것이 세계사의 고충이었다. 어떤 인간도 목적은 될 수 있어도 수단이 될 수는 없다는 가치관이 정착되어야 한다.

인류는 정치와 권력, 경제와 부, 과학에서 오는 기계와 기술의 개발에 많은 정성을 쏟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인간에게 더 편리하고 도움을 주는 수단과 방편으로서의 가치일 뿐 결코 목적가치는 되지 못한다. 이에 비하면 학문과 진리, 예술적 창작, 도덕과 그 가치는 전자들에 비하면 목적가치가 될 수 있을지 모르나 그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가치는 아니다. 만일 이 모든 것들을 포섭하면서도 최고·최후의 목적가치의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인격 및 인간을 위한 가치일 뿐이다. 모든 것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까닭이다.

이 인간에는 피부색의 차이가 있을 수 없고 종교적 신앙의 구별도 의미가 없다. 경제적 빈부나 직업의 상하관계를 가린다면 그 자체가 반인륜적 처사이다. 남녀의 불평등과 강자에 대한 약자의 상하관계가 용납되어서도 안 된다. 남녀간의 사랑은 상호간의 존경으로 승화되어야 하며 강자는 약자를 보호하고 위해주는 의무가 필수적이다.

인간에 대한 존엄성과 인권에 대한 신뢰성이 높아지는 사회가 21세기의 최우선 과제가 되어야 한다. 어떤 이들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가장 에스키모적인 것이나 가장 일본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고 말한다면 세계가 그 뜻을 그대로 수용할 수 있을까. 우리는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가장 인간적인 것이 세계적임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뜻이 자아를 포함한 개인들의 가치관이 되며, 민족과 국가를 통한 실천적 목표가 되는 사회건설에 동참하는 것이 우리 겨레의 지향점이 되는 것이다.

아메리카와 세계무대에 있어서….

사람들은 19세기를 절대주의적 사고가 지배한 시대, 20세기를 상대주의적 가치관이 자리잡은 역사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21세기는 다원적 사회, 다양한 가치관이 공존하면서 조화를 이루어 가는 문화권으로 발전해가기를 기대하는 세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세계적으로 번지고 있는 세계주의적 정책과 UN의 역할도 그 하나이며, 다원화된 사회가 세계의 주목을 끌며 다른 나라들의 지표가 되는 것도 관심의 대상이 된다. 아메리카가 그 변화를 선도해가고 있으며, 유럽의 새로운 탈바꿈으로 볼 수 있는 EU도 그 하나의 실례이다. 일본을 비롯한 단일민족의 폐쇄성보다 중국과 같은 나라의 다민족사회가 갖는 장점을 지목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냉전시대의 좌우 관념이나 지금 벌어지고 있는 진보와 보수의 정신보다는 누가 좁아지는 폐쇄사회를 벗어나 열려진 개방사회로 가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다원사회와 개방사회를 전개해가며 더 많은 사람이 인간다운 삶과 가치를 누리면서 그것을 창출해내는 의무와 사명에 동참하는 민족과 사회가 21세기를 건설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고달픈 삶 속에서 한 가닥 빛을 던져 준 도산의 정신이 바로 그런 뜻의 씨앗이었을 것으로 믿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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