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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와 기독교 신앙
이만열(숙명여대 교수, 국민회관복원추진위원회 준비위원장)


1. 머리말 - 도산 사상의 바탕

도산 안창호는 1878년에 태어나서 1938년 만 60세로 돌아간 우리 민족의 지도자요 큰 스승이다. 그의 전 생애를 통해 나타난 활동과 사상은, 한말 일제하에서는 민족의 독립과 국권회복운동으로 나타났지만, 21세기를 맞아서는 민족을 새롭게 거듭나게 하고 화해와 협력에 기반한 통일조국을 이룩하는 데에 전범(典範)이 되어야 하겠기에 우리는 다시 도산의 사람됨과 그 사상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그의 활동과 사상에서 일관되게 추구하고 있는 것은 -힘-이었다. 한말 봉건사회를 개혁하는 것도 힘이요,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여 독립국가를 이룩하는 것도 힘이었다. 그가 이 힘을 발견한 것은 오랜 사고와 경험을 통해서였다. 한말 일제하를 살아온 도산은 반봉건·반침략의 민족운동을 하려고 해도 무엇보다 건전한 힘을 배양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 힘은 "거짓말 하지 말라"고 강조하는 정직의 힘과, 무실역행에서도 보여주는 성실과 근면(부지런함)의 힘, 언어와 행동거지에서 보이는 신독(愼獨)과 절제(節制)의 힘 등이 어울려 이룩되었고 또 그것들로 나타나고 있었다. 특히 그의 사상과 행동에서 보이는 절제상(節制相)은 유모어와 부드러움을 동반한 근엄(謹嚴)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는 이 힘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을 움직여, 좁게는 공동체운동을, 넓게는 민족운동·국권회복운동을 추진하는 밑바탕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면 그의 이러한 힘의 배경이 되는 사상의 근원은 어디에 있었는가. 여러 가지를 거론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기독교의 성경과 신앙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가 18세의 나이로 서울에 올라와서 선교사들을 통해 구세학당에서 처음 만나게 된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일생을 이렇게 이끌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필자는 이 글에서 도산의 생애를 몇 개의 단계로 구분하여 개관하여 살펴보면서 그런 단계마다 도산이 기독교 신앙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이렇게 그의 생애마다에 나타난 기독교 신앙과의 관련을 살핀 후에, 그의 기독교 신앙의 성격을 당시의 비판적 견해와 더불어 규명해 보고자 한다.

2. 도산의 기독교 접촉과 교회 설립

도산 안창호는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강서군 도롱섬에서 농업을 경영하는 안흥국(安興國)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도산은 18세가 되는 1894년까지 고향에서 서당 수업을 받으며 지내다가 청일전쟁이 끝나갈 1895년경 서울에 가서 공부할 욕심으로 상경하여 언더우드(H.G.Underwood, 元杜尤)가 설립한 예수교학당에서 3년간 공부하게 되었다. 그가 기독교와 접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예수교학당을 통해서다.) 주요한이 쓴 『安島山全書』상 -傳記篇- 23쪽에는, 예심판사의 심문조서에 의거하여, 도산은 자기의 종교를 기독교 장로파라 하였고 17세때에 단신으로 상경하여 당시 정동에 있는 원두우 학교의 보통반에 입학하여 동반을 졸업하고 특별반에 들어가 17(sic)세때 졸업했노라고 했다는 것이다. 뒤의 '17(sic)'세는 19세일 것이다.

서울에 와서 노자가 떨어진 도산은 마침 정동 거리를 지나다가 선교사 밀러(F.S.Miller, 閔老雅)가 서툰 한국말로 "배우고 싶은 사람은 우리 학교로 오시오. 먹고 자고 공부를 거저 할 수 있소"라는 권면에 따라 이 학교에 들어가 신학문을 배우게 되었다. 이 무렵 밀러는 그의 선교 보고서에서 안창호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즉, 도산은 새해를 맞아 옷 수선을 위한 명목으로 3원을 밀러 교장에게 빌린 일이 있었는데 그후 새 옷이 보이지 않고 일감을 달라고 요청하기에 속임수인가 의심이 들어, 옷 수선을 위해 빌려간 3원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저는 그 돈을 갚을 일거리를 찾고 있는데 당신께서 요구하면 언제든지 돌려줄 수 있도록 상자 속에 넣어 두었다"라고 대답하자 밀러는 "그를 잘못 판단했음을 깨닫고 눈물이 났다"고 기술하고 있다. 젊은 시절이지만 도산의 정직성과 근면성이 잘 드러나고 있는 대목이다.) F. S. Miller, Report of Boys School of Mission, Korea Seoul, Oct. 1895(Reports and Letter from Korea Mission, PCUSA, 1884-1920)(『도산안창호전집』제5권, 53∼66쪽).

그 학교는 선교사 언더우드가 설립했지만 일찍부터 한국인 교사도 있었다. 처음에 정동명(鄭東鳴)이 있었고 도산의 입교 당시에는 송순명(宋淳命)이 있었다. 신학문을 공부하는 동안, 도산은 그 학교의 접장으로 있던 송순명으로부터 전도를 받아 예수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도산은 그 이듬해 자신도 접장이 되어 한 달에 일원이란 보수를 받게 되었다.) 주요한, 앞의 책, 24쪽. 이 때도 밀러는 도산을 세심하게 관찰한 듯 그의 보고서에서 다시 도산을 언급하고 있었다. 밀러는, 도산이 18세로서 상급반 학생의 일부가 자존심을 내세워 그의 말을 잘 듣지 않아 실망하고 있으면서도 구세학당의 접장일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다고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평양에서 온 소년 안창호는 전에 있던 접장(영길이)보다 훨씬 훌륭하였다. 실제로, 학당은 평양에서 온 이 소년의 열정과 활력 덕분에 새로운 단체가 된 것 같다. … 창호는 자기 주위에서 가장 훌륭한 학생들을 끌어 모아 열정과 활력을 불어넣고자 노력하고 있다".) F. S. Miller, Report of Boys School of Mission, Oct. 16th. 1896(Reports and Letter from Korea Mission, PCUSA, 1884-1920)(『도산안창호전집』제5권, 67∼75쪽). 이 보고서를 쓰고 있을 때에 밀러가 주관하고 있던 구세학당에는 등록된 학생 수가 50명 정도였고, 출석 학생은 35-40명 정도였으며 교육과목은 성경을 비롯해 산술, 지리, 음악, 생물 등 근대적 학문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F. S. Miller, Report of Boys School of Mission, Oct. 16th. 1896(Reports and Letter from Korea Mission, PCUSA, 1884-1920)(『도산안창호전집』제5권, 67∼75쪽). 이 학교는 뒷날 경신학교로 발전하게 되거니와 성경을 기초로 하여 근대학문까지 가르치는 이 학교에서 도산은 근대적인 사상을 받아들이며 자기성장에 큰 계기를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도산이 한말 양계초(梁啓超)의 『飮氷室文集』을 비롯한 개화와 관련된 책을 읽었고 미국에서 짧은 기간동안 교육을 받게 되지만 그의 학력이 이 구세학당으로 거의 끝난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 학교의 교육이 도산의 인격과 사상 형성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이 학교에서 도산이 밀러로부터 위와 같은 관찰과 평가를 받았다는 것은 뒷날 밀러가 도산의 도미(渡美)를 적극 지원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고 할 것이다.) -미국 유학의 목적을 묻는 흥사단 사건 예심 조서- 에서 밀러와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도산은 밀러를 두고, "그 사람은 본인이 통학하던 원두우학교의 교장이요, 또 미국 선교사이므로 동인의 주선으로 본인이 도미하였던 것이다."라고 했다(주요한, 『안도산전서』, 35쪽).

도산이 기독교에 들어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나름대로 신앙을 고백하게 되는 것은 늦어도 1895년으로 보인다. 복음을 받은 이후 도산은 곧 기독교의 진리를 전도하고 교회를 건립하는 데에 적극적이었다. 1897년의 증언은 이를 뒷받침한다.

"평양 보통문안 사  리영언이가 신문국에 편지  殆끝  평양 남촌 도롱셤에 리셕관이라 鐸 사 은 본  집은 가난搭 한문을 힘써 션 라 칭鐸 사 이라 여러번 예수교 젼도鐸 말을 드 나 죵시 밋지 아니榻醮 셔울 졍동 학당에셔 공부鐸 안챵호라鐸 사 이  작년에 와셔 리셕관을  져 보고  긔가 젼에  榻篇 모든 일이 죄로 말 암아 죽을수 밧긔  업던  셰  낫낫치 말糖 눈물을 흘니고 예수의 십 에 보혈을 흘니샤 셰샹 사 의 죄   쇽態 주신 말 을  셰히 젼파糖 진심으로 권榻 리셕관이가 그 권鐸 말을 듯다가   이  연 셩령의 감화 을 엇어 제죄  회 耽 여러 사 을 진심으로 권糖 회당을 셜시耽 여러 곳으로  니며 젼도鐸  드개치라鐸 동리도 회당을 셜시耽 두곳 교우가 륙십여명이 되   일심으로 샹쥬  공경糖 예수의   빗  증거榻 이러 깃븐 소문을 여러 교우로 알게鐸〈 그리스도 신문에 긔 貪戍  라노라 殆낸척") "평양 보통문안 교회", 『그리스도신문』1897. 7. 1(『도산안창호전집』제5권, 77쪽).

위에 인용한 글은 언더우드가 책임자가 되어 간행한 장로회의 주간신문인 『그리스도신문』에 게재된 것이다. 밑줄 친 부분에서는 1895년 당시 '정동학당'(언더우드 학당)에 다니던 안창호가 구원의 도리를 말하며 전도하는 내용이 잘 나타나 있다. 그 내용은 안창호의 신앙고백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수용될 당시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이러한 신앙고백이 가능했다면 그는 구세학당 시절에 세례를 받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그가 예수를 믿기 시작한 초기의 신앙생활과 관련하여, "선생은 20년 전 소년시절부터 예수를 믿고 그리고 열심으로 전도"했고, "고향인 평안남도 강서군 송만리에 점진학교라는 학교를 세우고 새교육을 힘쓰는 한편 교회를 세우고 일심으로 전도를 하고 친히 설교를 하였"다는 전영택의 증언) 전영택, "안도산(安島山) 선생", 『크리스챤』1961. 3. 11-『도산안창호전집』제13권, 431쪽. 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도산은 서울 유학에서 새로운 인생관과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 김현진 문하에서 사서삼경을 읽고 필대은에게서 민족사상을 받은 그가 이제 기독교 사상에 접하고 과학 문명이라는 새로운 지평선의 광경을 제 눈으로 보게 된 것이다. 그가 인류를 사랑하는 점에서 기독교적이었다거나 중요한 일을 당할 때에 예수교식으로 기도를 올렸다는 것은 서울 유학에서 받은 기독교적 영향을 배제할 수 없다고 본다.) 이광수, 『도산 안창호』75쪽 참조. 이광수와 마찬가지로 주요한도 도산이 예수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가 흥사단을 창립하고 규칙을 정할 때에, 문답식과 입단식·서약례 등을 행하게 하고, 모일 때에 노래를 부르도록 한 것 등은 기독교의 의식에서 본뜬 것이 분명하다. 도산이 사랑의 세계를 말하고, 자유 인권을 존중하며, 동포간의 무저항주의를 주장한 것 등은 기독교 사상의 영향임을 알 수 있다.") 주요한, 『안도산전서』25-26쪽.

앞의 인용문에서 도산이 자기 고향인 도롱섬에 와서 이석관을 전도하여 큰 교회를 세우게 한 것을 보았다. 예수를 믿기 시작한 초기에 열심히 전도한 도산의 영향력은 강서군 일대에 여러 교회를 세우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강서군 탄포리(灘浦里)교회는 도산이 평양에서 이 곳에 와서 전도하여 믿게 된 이들이 설립한 것으로 그들이 안창호의 집에 모여 교회를 성립시켰고,) 『朝鮮예수敎長老會史記』, 조선예수교장로회, 1928(『도산안창호전집』제5권, 76쪽) (1894년) "江西郡 灘浦里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敎人 安昌鎬가 平壤으로부터 本里에 來하야 傳道함으로 徐順化 金用基 吳夏俊 等이 信從하고 平壤板洞敎會에 往來하며 禮拜하더니 未幾에 信者 十一人이 安昌鎬家에 會集하야 敎會를 遂成하니라" 여기서 『朝鮮예수敎長老會史記』가 탄포리교회의 성립과 관련하여 '1894년'과 '안창호의 전도'를 연결시킨 것은 재검토되어야 한다.

강서군 청산리교회도 안창호의 전도를 받은 이들이 교회를 세웠던 것이다.) 『朝鮮예수敎長老會史記』, 조선예수교장로회, 1928(『도산안창호전집』제5권, 76쪽) 江西郡 靑山浦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安昌鎬의 傳道로 李澤鎭 李泰和가 始信하고 章臺峴 高氏의 傳道로 金在鍵 金道淳 康樂浩 等이 繼進하야 熱心傳道함으로 信者가 漸興하야 敎會가 遂成하니라" 이로도교회는 도산의 전도를 받아 세운 탄포리교회와 송호리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이 다시 세운 것으로 이로도교회와 송호리교회도 또한 안창호의 영향력으로 이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朝鮮예수敎長老會史記』, 조선예수교장로회, 1928(『도산안창호전집』제5권, 78쪽) (1899년) "江西郡 伊老島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安昌鎬의 傳道로 鄭達堯 高奉翰 韓氏達信 等이 歸道하야 灘浦里敎會와 松湖里敎會로 단니다가 漸漸 旺盛하야 祈禱室 四間을 新築하고 松湖里에셔 分立되야 다시 瓦家八間 禮拜堂을 增築하니라"

도산이 기독교를 수용하기 전에 미국 북감리회(1892)와 북장로회(1893)가 선교사를 평양에 파송, 전도하여 개종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1894년에는 평양감사 민병석이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를 가함으로 기독교 선교가 불안했다.) 평양 기독교인 박해에 대해서는 김승태, <1884년 평양 기독교인 박해사건>(韓國基督敎史硏究, 15·16호, 1987, 19-20쪽) 및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 기독교의 역사 I』(기독교문사, 1990) 249쪽 참조. 도산이 개종했던 시기를 전후하여 그와 뜻을 같이한 동지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고 있었다. 임기반·필대은·이강 등이다.) 주요한,『안도산전서』 19-20쪽. 이들의 개종이 도산의 전도에 의한 것인지 다른 전도자들을 통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앞서 보았던 바와 같이, 도산이 개종 초기에 그렇게 열심히 전도했다면 이들 동지들의 개종이 도산의 전도와 깊이 관련되어 있었을 것이다.) 『도산안창호전집』제13권, 895∼916쪽에 의하면, 1894년 구세학당 보통부에 입학하여 영어와 서양의 과학문명을 수업하고, 기독교 교육을 받은 그는 이즈음에 예수교 장로교에 입교하고 필대은을 신앙으로 인도했다고 적었다. 그는 이 무렵에 자신이 믿는 기독교의 복음이 자신을 구하고 민족을 구한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혼자서만 간직하지 않고 그것을 널리 전파하는 데에 앞장섰던 것이다.

3. 교육자의 모습과 신앙 교육

서울의 언더우드 학당에서 접장을 하는 동안 그는 청일전쟁이 끝나고 민비시해사건을 비롯한 여러 가지 사건과 변화가 계속되고 있음을 보았다. 그는 1897년에 조직된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한편 그 후 5년간 경향각지를 유세하며 청년웅변가로, 애국운동자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고향에 돌아와서는 점진학교를 세워 경영하고) 안창호가 고향에 세운 漸進학교는 후에 기독교 장로교에서 인계하여 일제 시대에도 계속되다가, 해방 후 공산 정권의 손으로 폐쇄되었다(주요한, 『안도산전서』, 32-33쪽). 강서의 황무지개간 사업에 손을 대었다. 그러다가 1902년 9월 3일 제중원에서 밀러 목사의 주례로 이혜련과 결혼식을 올린 다음 날 그는 미국 유학에 오르게 되었다. 구세학당에서 배운 신문명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그를 유학의 길로 내몰았던 것이다.

미국에 도착한 도산 부부에게는 그날 그날의 끼니조차 해결하지 못한 채 눈물겨운 신혼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한 미국인 선교사를 알게 되어 도산 부부는 그의 집에 들어가 집안 일을 도우면서 말을 배우고 식생활을 해결할 수 있었다.) 주요한, 『안도산전서』, 53쪽. 미국 생활에 적응하면서 그는 동포들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도산은 미주본토에 상륙한 한인들이 상부상조와 자신들의 품위를 높이기 위해서는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1903년 9월 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상항친목회를 조직, 회장에 피선되고 교민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전에 비난받던 한인사회가 몰라볼 정도로 정화되고 미국인들로부터 칭찬을 받게 되었다. 이광수는 그의 책에서, 도산이 한인을 지도하기 위해 사용한 회관이 뒷날 예수교회당으로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도 도산은 자신이 예수교인으로서 살아가려고 노력했을 뿐아니라 교민들도 그렇게 지도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신네 한인들의 생활이 일변하였소, 위대한 지도자 없이는 이리 될 수 없소' 함으로 한인들은 안창호라는 사람이 와서 지난 1년동안 우리를 지도하였다고 대답하였다. … 그 미국인의 가주(家主)는 도산을 극구 칭양(稱揚)하고 도산의 공적에 감사하는 뜻을 표하기 위하야 자기 가옥에 거주하는 한인의 집세를 매년 일개월분을 감하겠다는 것을 선언하고 또 도산이 한인을 지도하기에 사용할 회관 하나를 무료로 제공할 것을 자청하였다. 이리하야 얻은집이 한인의 최초의 회관이오 예수교회가 되었다") 이광수, 『도산 안창호』, 31쪽.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을 지도하면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후 도산은 1904년 3월에는 로스앤젤레스 인근 리버사이드로 이주하여 기독교 경영의 신학강습소에서 영어와 신학을 수업하게 되었다. 이어서 1905년 4월 5일에는 한인친목회를 발전시켜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으로 되었으며, 그 해 11월 14일에는 퍼시픽 가에 공립협회 회관을 건립함과 동시에 11월 20일에는 『공립신보』를 창간하게 되었다.

이렇게 교민사회를 섬기는 지도자로 등장한 도산은 동포들에게 교회에 나가기를 권하는 한편 교민들이 출석할 만한 교회를 친히 점검하고 그런 교회를 소개하기도 했다. 주요한의 증언이다.

"리버사이드 동리에서 18명의 한인 노동자들이 모이어 공립협회를 조직하여 미구에 회원이 35명으로 늘었다. 도산은 또 회원들을 교회에 보내기 위하여 근방 예배당들을 찾아 다니면서 목사의 선을 보고,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목사가 있는 장로교 신령회교회에 다니기로 하였다. 도산은 그 목사한테 캠프에 와서 야학을 봉사적으로 가르쳐 줄 선생을 청구했더니, 주일날 목사가 설교 끝에 지원자를 나서라고 하는데 열 한 명이나 자원해 나섰다. …도산이 또 교사 선을 보고 그 중에서 골라 오게 하였다.") 주요한, 『안도산전서』, 47쪽.

이같이 교회에 다니도록 권고하고 또 잘 지도하는 교회를 선정하여 출석토록 하면서 도산은 늘 입버릇처럼 "미국의 과수원에서 귤 한 개를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도산의 이러한 노력은 농장의 수입을 올려주어 한인 노동자들에 대한 신뢰를 높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곳 교회의 여러분들이 도산과 한인들의 성실한 노력에 감사하도록 만들었다.

"하루는 한국인들이 다니던 교회의 미국 부인, 어머니같이 한국인을 돌보아 주던 그이가 교회에서 도산을 대접할 터이니 오라 하여. 미국인 목사가 말하기를 '이곳서 일하는 한국인을 일년 동안 지나 보는데 모두 좋은 사람뿐이니 놀라웁고 고마운 일입니다.' … 한 과수원 회사 사장은 '우리 회사는 금년에 한국 형제들의 덕분으로 이익을 많이 보아 감사히 생각합니다....' 교인들은 한국인에게 40권의 성경과 찬미책을 기념으로 선사하고, 여자 교인들이 전부 나와 축하하였다. 도산은 대답하기를 '당신들이 도와 준 까닭으로 일년 동안 우리는 잘 지내왔소이다. … 그리고 다른 곳에서 일하는 우리 동포들도 당신 같은 고마운 사람을 만나도록 부탁합니다.'") 주요한, 『안도산전서』, 48-49쪽.

한인들이 미국 사회에서 이렇게 신뢰를 얻게 된 것은 도산의 탁월한 지도력과 함께 교회가 신앙적으로 이들을 뒷받침해주었기 때문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도산이 미국에서 지나는 몇 년 사이에 한국에서는 노일전쟁을 거쳐 일제의 노골적인 침략을 받고 있었다. 1905년 을사늑약을 통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간 일제는 한국에 대한 식민지화를 서두르고 있었다. 일본과의 전쟁에서 진 청나라·러시아는 물론 미국과 영국이 노골적으로 일본을 뒷받침하면서 일제의 한국 식민지화를 측면 지원하고 있었다. 도산은 조국의 이런 위기를 강 건너 불 보듯이 좌시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1907년, 29세의 나이로 일본을 거쳐 귀국한 도산은 신민회를 조직하고 대성학교와 마산도자기회사 및 태극서관을 일으키는 등 국내민족운동을 서두르게 되었다. 이 무렵 그는 대성학교 학생들을 위해 기독교 신앙을 지도하였다. 그는 자신의 젊은 학창 시절 기독교 교육이 큰 도움이 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교장으로 총명한 기억력에 연초를 즐겼으며, 『음빙실문집』을 그 학교의 교재로 사용하면서 때로는 그것을 가르칠 정도의 한학실력을 갖추었음에도 여성해방의 선진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기독교 교육이 대성학교의 정신을 구현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 당시 기독교계의 애국지도자인 전덕기 목사와, 게일(J.S.Gale) 푸트(W.R.Foote) 같은 선교사를 초청, 기독정신을 고취시키는 한편 '기갈모의(飢渴慕義)' 등의 문제로서 설교하였고 그 자신 교회당에 출입하기를 게으르지 않았다고 한다.) 洪箕疇, "安島山의 校長時代; 一學生의 메모란담", 『東光』1933. 1·2(『도산안창호전집』제13권, 67∼68쪽) "기독교의 眞信者-그는 소년시대부터 기독교에 귀의한 신자이엇다. 특히 그때 청년들에게 기독의 희생적 정신을 함양시키기 위하야 학교내에 성경연구회를 두고 매수요 오후 하학후에는 기독교계의 태두인 고 전덕기목사가 奇一 富斗一(땅재조 잘하는 운동가이엇슴에 그 기능까지 하게 함)선교사 등 제 선생을 請邀하야 기독정신을 고취시키는 동시에 매일요마다 학생으로 하여금 교회당에 가기를 장려하여 불신자의 학생을 따로 강당에 회집시켜놓고 친히 '飢渴慕義' 등의 문제로써 설교하며 자신 역시 교회당에 출입하기를 不惰하엿다."

대성학교 제자인 전영택 목사도 같은 증언이다.

선생님께서는 가끔 빠이불(聖經)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의에(義)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히가 배부를 것이오" 한(신약성서 마태 5장 6절) 말씀을 가지고 가르치시던 일이 기억납니다. "옳은 일에, 가령 말하면 약자가 어굴한 일을 당할 때에 그것을 돕고 구하려고 간절한 마음으로 용기있게 나서야 한다는 말입니다. 옳은 일에 나설 인심과 용기가 없는 자는 사나이라고 할 수 없소. 우리는 비겁한 남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전영택, "大成學校의 精神", 『새벽』1954. 9 -『도산안창호전집』제13권, 574쪽.

이렇게 도산이 직접 성경을 읽고 가르쳤다는 증언은 도산이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초기부터 민족운동을 하기 위해 귀국했을 때까지 그의 기독교 신앙생활은 종래와 다름이 없었다고 보여진다. 그는 여전히 교회당에 열심히 나갔으며 때로는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했던 것이다. 증언자들은 도산이 이 때 민족문제를 두고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다는 것도 전해준다.) 전영택, "안도산(安島山) 선생", 『크리스챤』1961. 3. 11-『도산안창호전집』제13권, 431쪽/ 張利郁, "安島山 秘錄", 『思想界』1965. 3 -『도산안창호전집』제13권, 451쪽 그는 점진학교 시절부터 전도와 설교에 힘썼을 뿐 아니라 교민을 교육하는 데에도 기독교 신앙을 활용하였고 귀국해서 대성학교에서 새로운 교육운동을 시작했을 때에도 그는 몸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피교육자들에게도 기독교적인 신앙생활을 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의 선교사들이 전수해준 신학과 교리를 묵수하는, 그런 신앙생활을 했는지는 단언할 수 없다.

4. 기독교인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기대

1910년, 도산은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지는 것을 보면서 '거국가'를 남기고 망명의 길에 오른다. 4월 중순 중국 위해위를 향해 출발, 천진·북경을 거쳐 청도에 이르러 '청도회담'을 개최하고 다시 러시아 행 비자를 받기 위해 북경에 갔다가 상해·연태·청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니콜리스크의 최관흘 목사를 방문, 그와 함께 국민회 확장과 기독교 전도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1911년 5월, 도산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치타·이르크츠크·페테르스부르그·베를린·런던·글래스고우를 거쳐 9월에 뉴욕에 도착했고 시카고를 경유, 새클라멘트의 한인 농장을 방문한 후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향했으며 클래어몬트·샌프란시스코·스팍톤 등지의 한인사회를 순방했다. 이 무렵부터 1919년 다시 미국을 떠날 때까지 도산은 비교적 순탄한 가정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도산의 뉴욕 도착은 1911년 9월 2일이었다. -안창호씨 도미- 라는 제목으로 도산의 뉴욕 도착을 보도한 신한민보는 도산을 "민족의 정신을 대표하여 조국의 역사를 광복코자 동서 내외에 무한한 풍상을 무릅쓰고 다니는 안창호") "안창호씨 도미", 『신한민보』1911. 9. 13 -『도산안창호전집』제5권, 201쪽. 로 묘사하면서, 교민들을 대신하여 그의 미주 도착을 열렬히 환영하였다. 신한민보의 환영하는 글이다.

"오 은 우리가 우리의 사랑耽 신앙宕 안챵호씨를 환영鐸 깁븐 날이라 (중략) 우리  외 동포에게 片땀 부탁  말 은 달음안이라 동씨가 뎌 치 나라를 위態 일신을 희 殆 슈젼도耽 륙젼도耽 산젼도 으로 입이타고 혀가 모 어지다가 이졔 미쥬로 건너온것은 참말 쇽담에 환토인 이라 이와 치 고  것이다  디동포의  지 못  문인즉 우리  아모조록 그져간 잘못榻 것을 후회耽 공평 마 과 관후 셩질과 졍딕 쥬의를 가지면 동씨  우리의 환영을 깃버 이로다") 美山靑年, "安昌浩君을 歡迎홈", 『신한민보』1911. 9. 27 -『도산안창호전집』제5권, 202쪽.

위의 글은 미주를 비운 지 5년 만에 다시 돌아온 도산에 대한 최대의 찬사였다. 그가 이같은 환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나 그 뒤에 도산이 대한인국민회 등을 조직함에 따른 교민의 호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도산에 대한 신뢰를 의미하는 것이다. 미주에 도착한 도산은 교민들의 여러 환영회에 참석하여 그 동안 겪은 소회를 피력하기도 했다. 도산은 한 환영석상에서 나라가 망했기 때문에 기쁜 소식이 있을 수 없지만 그는 기쁜 소식을 전하겠다고 하면서 나라 망한 책임이 이완용, 송병준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 민족된 자는 다 망국의 죄가 있다고 주장하는 한편, "전일에 나라를 망하게 한 자는 곧 금일에 나라를 회복할 자이니 이제 여러 방면으로 보건대 … 무궁한 희망이 있으니 이것이 나의 기쁜 소식이요"라고 했다. 이어서 도산은 한국의 기독교인에 대한 희망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망국과 관련, 한국 기독교인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곁들이고 있어서 주목된다.

"… 혹쟈는 한국에 잇  교인도 모다 일인의 셰력범위로 들어갓다 말搭 결단코 그럿치 안殆 이  모다 일인의 신문샹에 졍 변으로鐸 말이오 그 실샹은 조국졍신이 뎨일 풍부 인격을  즈려면 모다 교회안에 잇소 그이들의 鐸÷舅 모다 나라일흔 쟈로 態薩 나라찻  쟈  다시 만들기에 진력  다 국듕에 뎨일 유공坪靜 교인이라고 나  담보라도 耽模弩甄 교인듕에셔 일인의 심복이 된쟈 잇다 搭 이  본  교인도 안이오 쟝  교인도 안이오 이  일인이 교인의  졍을 알고져態 은밀히 뎡탐군으로 態薩 교회의 세례  밧게 쟈이니 그 거동을 보면 참교인과 갓히 찬미를 糖 긔도를 態 남의 이목을 속히되 졔엇지 구쥬의  을 몸밧은 참교인을 롱락 슈야 잇겠소.  교인들은 과연 금일에 대단히 유공 동포들노 아시오   혹쟈  말宕 일본의 개명이 한국보다 만져 되엿다鐸 나  한국의 개명이 만져 되엿다  다 웨그런고 榻 개명鐸 길이 둘노 난호여 일인은 졍티샹으로 물질뎍 개명은 한인보다 만져 되엿다鐸≠淄 도덕상으로 졍신뎍 개명은 결단코 일인이 한인을  을슈없으니 우리가 이제 물질뎍 방면으로 힘을 더쓰  디경에  소위 일인의 문명은  희가 업   과    이니 엇지  희를 박고 퓌   을  을수잇소    교인은 동족을 건지기에 달은   보다 몃갑졀 더 힘쓸 증거를 말殆쳄甄 향쟈에 인도사람을 위態 교회에셔 의연을 쳥   에 엇던 부인은  긔의 빈혀 지   것을 내가 목도態轢 보지 못鐸 인도인을 위態鈒킵 이러틋 耽큄 눈으로 보  동포의 도탄을 건지  일에야 오작  리가 잇겟소 그런고로 우리 동포듕에  국심이 뎨일 만키  교인이라   다.…") "안챵호씨의 연셜-상항동포환영회 셕샹에셔", 『신한민보』1911. 10. 4 - 『도산안창호전집』제5권, 204쪽.

한국 기독교인들에 대한 이 같은 그의 평가는 도미 후에 만났던 많은 사람들의 한국 교회에 대한 질문에 대한 응답형식을 띄고 있다. 그는 당시 기독교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곁들인 이런 연설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가 국권회복 운동에 임하면서 기독교 정신을 버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국권회복운동이 서북지방의 기독교인들의 도움에 근거했기 때문이다. 도산은 한국 기독교인들에 대한 미주 교민들의 의혹을 제거함으로써 그 뒤에 계획하고 있는 민족운동에 미주 거주 기독교인들의 적극적인 동의와 도움을 끌어내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 기독교인에 대한 신뢰는 곧 미주에서 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한인 기독교인들에 대한 신뢰를 의미할 수도 있다.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도산은 1912년에 들어서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미주 지역 기구조직에 착수한다. 도산은 이해 11월에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조직하고 중앙총회장에 피선되었고, 북미지방총회(샌프란시스코)·하와이지방총회·시베리아지방총회·만주지방총회 등을 두었다. 그 이듬해 5월에는 흥사단을 창립하고 7월에는 대한인국민회 부설로 클래어몬트 학생양성소도 재창립했다.
도산은 이 때부터 캘리포니아주 일대의 한인사회를 심방하면서 동포를 격려했다. 망국민의 설움을 딛고 교민들이 생업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도산 같은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1915년 8월에는 하와이 국민회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호놀룰루를 방문하고 이어서 하와이 각 섬을 방문하였으며, 1917-1918년에는 멕시코 각지의 교민들을 순방하였다. 도산이 한인순방할 때에 교민들은 대부분 한인예배당을 이용하여 그를 환영했고 그 또한 한인 예배당에서 한인들에게 연설했다. 1918년 11월 1일, 도산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으로서 북미·하와이·멕시코 지방총회 및 동포들에게 단합 권고문을 보냈는가 하면, 제1차세계대전 종전에 즈음하여 파리강화회의와 약소국민동맹회에 한국대표 파송을 결정하는 대외활동에도 나서게 되었다. 이렇게 대한인국민회가 한인을 대표하는 정부 기능을 대신 수행했다고 해서 하등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이 기간에 있었던 도산의 활동은 결국 1919년 3·1운동으로 연결되어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준비활동의 역할로 평가될 수 있다.
3·1운동이 발발했을 적에 도산은 1919년 3월 13일 북미 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위원회 석상에서 <3·1운동을 계승>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한 것으로 전한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의 지위명령 아래서 독립운동을 추진할 것이라는 의지를 표명하는 한편 종교계(기독교계)가 한국 기독교도의 참상을 널리 고하고 위하여 기도하며 비인도적인 일본인의 만행을 세계에 폭로해야 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도 보인다.

"(전략) 하나님의 지휘명령아래서 죽음이 아니면 독립, 두 가지로써 뒤를 이어 나아갈 것이 올시다. … 우리는 지금으로부터 준비하여 널리 유세하며 각 신문·잡지를 이용하여 여론을 불러일으키고 종교계에는 지금 한국 교도의 악형받는 참상을 널리 고하여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기를 청구합시다. 이렇게 하여 미국 전국 상하로 하여금 사람마다 한국의 사정을 알아서 많은 동정을 기울이게 되면 장래 우리 활동에 힘 있는 도움을 얻을 것이올시다. 이것이 곧 외교의 활동이니 우리 미국에 있는 동포들의 특별히 당부할 책임이요. (후략)") 도산기념사업회 편, 『安島山全書』中 (1990) 89-90쪽 - 『도산안창호전집』제5권, 903쪽.

도산은 3·1운동이 발발한 한달 후인 4월 1일 상해로 가기 위해 뉴욕을 출발했다. 이 때 그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모금한 6,000달러를 휴대하고 보좌관 정인과와 통역관 황진남을 대동하고 있었다. 휴대한 금전은 결국 도산이 임정을 꾸리는 데에 사용하게 되지만, 당시의 상황으로 봐서 모금은 대부분 미주 안의 한인교회를 통해 이뤄졌을 것이다. 상해에 도착해서도 그는 5월 26일과 6월 4일에 각각 상해 북경로 예배당에서 독립운동 진행방침을 연설하였다. 아직 교민단체가 있다 하더라도 마땅한 회집 장소가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을 것이기에 교회당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본다면 도산의 독립운동이 기독교계와의 연계하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도 된다.
5. 국권회복운동과 신앙생활 (미완성)
6. 도산의 기독교 신앙(미완성)
7. 맺는 말 - 기독교 신앙인 도산
목회자로서 문필가였던 전영택은 일찍이 그의 스승 도산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는데 약간 긴 느낌이 있지만 인용해 본다.

"…선생은 20년 전 소년시절부터 예수를 믿고 그리고 열심으로 전도를 했읍니다. 그는 그 고향인 평안남도 강서군 송만리에 점진학교라는 학교를 세우고 새교육을 힘쓰는 한편 교회를 세우고 일심으로 전도를 하고 친히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는 조국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는 것이 가장 하나님의 뜻을 충성스럽게 행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사실 선생님의 시대의 우리 민족이 당한 처지와 풍전등화와 같이 위급한 운명으로 보아서 조국독립을 위하여 일생을 바쳐 활동하는 것이 가장 바른 길이요 가장 큰 사명이라고 믿어졌던 것입니다. 그는 성경을 극히 사랑하고 애독하였읍니다. 특별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요' 한 말씀이나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한 말씀을 깊이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그의 좌우명으로 삼았읍니다. 그리고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나니라' 한 예수님의 말씀은 그의 민족지도 이념의 근본 사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한국사람은 정치가나 교육가나 종교가나 문학자가 되기전에 먼저 하나님앞에 옳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철저한 신념이었읍니다. 그래서 그가 친히 성경을 애독하면서 청년들에게도 읽기를 권했읍니다. 선생은 '우리 2천만 동포가 모두 손에 신약전서를 한 권씩을 가지는 날에는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웨친 일이 있습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읍니다. 나라를 위하여 밤을 밝히면서 근심을 하고 회개를 하면서도 신앙과 희망을 가지고 기도로서 하나님께 간구하였읍니다. 이 기도의 정신과 성경의 교훈은 그의 평생의 나라를 위한 활동을 지배하였던 것입니다. '도산 선생은 애국자요 민족운동가이었으나 종교가는 아니라'고 하겠읍니다. 판에 박힌 소위 종교가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 정신과 그 생애로 보아서 또 종교가라고 보아도 잘못은 아니라 하겠습니다. 그 어른은 철두철미 자기 부정의 생활을 하였고 사(私)를 떠나서 오직 '공'(公)을 위해서만 살았으니 이는 곧 예수그리스도의 자기 부정(自己否定)의 정신 남을 위하여 자기를 버리는 높은 자기희생의 정신을 배와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하겠읍니다.…") 전영택, "안도산(安島山) 선생", 『크리스챤』1961. 3. 11, 4. 12 - 『도산안창호전집』제13권, 431∼432쪽.

전영택이 설명하는 도산은 매우 기독교적인 신앙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도산은 소년시절 예수를 믿고 난 뒤에 열심으로 전도했고, 여러 교회를 세우고, 점진학교라는 학교를 세우고 친히 설교를 했다. 도산은 기독교를 의의 종교라면서 그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도산은 '우리 2천만 동포가 모두 손에 신약전서를 한 권씩을 가지는 날에는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외쳤는가 하면, 기도하는 사람이기고도 했다. 그는 또한 나라를 위하여 밤을 밝히면서 근심하고 회개하면서 희망을 가졌다. 따라서 도산은 전형적인 종교가는 아니지만 진정한 종교가로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도산을 철저히 자기 부정·자기희생의 사람이었다고 평가했던 것이다.
도산은 담배를 피우는 등 외형적으로는 신자가 아닌 듯했지만, 내면적으로는 누구보다 앞선 기독교 신자였다. 그는 선교사들이 가져다 준 정교분리의 신앙이나 민족이 빠진 신학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의 신앙은 당시의 민족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려 했고, 민족문제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그 앞에서 해결점을 찾으려 했던 신앙이다. 그는 민족문제를 추구하는 신앙인인 한편 의와 사랑의 보편적인 가치를 갈구했던 기독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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