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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와 대한인국민회- 崔起榮*

1. 머리말
2. 초기 미주한인사회와 대한인국민회
3. 대한인국민회와 안창호
4. 맺는말

1. 머리말

도산 안창호(1878-1938)는 세 차례에 걸쳐 미국에 거주하였다. 그 첫 번째는 1902년 10월부터 1907년 1월까지로, 유학을 목적으로 도미하였다가 한인친목회와 공립협회를 결성하는 등 초기 이민사회를 지도한 바 있다. 두 번째는 1911년 9월부터 1919년 4월까지로,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 직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강제로 귀국할 때까지 계속된 망명의 시작이었다. 이 때 안창호는 북미실업주식회사를 발기하고 흥사단을 조직하였으며, 대한인국민회의 중앙총회장으로 하와이와 멕시코를 방문하는 등 미주 한인사회를 이끌었다. 세 번째는 1924년 12월부터 1926년 3월까지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각료를 사임하고 국민대표회의를 주도한 뒤 대독립당운동과 이상촌운동을 전개하며 그 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도미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안창호가 미주에 머문 기간은 13년에 걸쳤고, 그 가운데에서도 제2차 도미기간은 7년 반에 이르렀다. 이 발표는 제2차 도미시대의 안창호의 활동을 살피고자 하는 목적에서 작성되었다. 다만 미주 교포사회를 이끌어간 대한인국민회와 관련하여 안창호의 역할과 활동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2. 초기 미주한인사회와 대한인국민회

*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한국근대사. ) 이에 대해서는 方善柱, [朴容萬評傳], 在美韓人의 獨立運動, 翰林大學校 아시아 文化硏究所, 1989; 崔起榮, [韓末 美洲의 大同保國會에 관한 一考察], 水邨朴永錫敎授華甲紀念 韓民族獨立運動史論叢, 探求堂, 1992; 金度勳, [1910년대 초반 미주한인의 임시정부 건설론], 한국근현대사연구 10, 1999 참조. 특히 金度勳의 논문을 크게 참조하였다. 대한인국민회는 1910년 2월 10일에 결성되었다.) 신한민보 1910년 2월 9일자 논설[賀兩會之合同]. 그것은 이미 1909년 2월 1일 하와이의 합성협회와 미주의 공립협회가 합동하여 이루어진 국민회를 기반으로 한 단체였다. 국민회의 창립에 참여하지 않았던 미주의 대동보국회가 이 해 2월 10일에 국민회에 통합되자 명칭을 대한인국민회로 바꾸었던 것이다. 사실 "교육과 실업을 진발糖 자유와 평등을 뎨챵態 동포의 영예 증진糖 조국의 독립을 광복케  ") 신한민보 1909년 3월 24일자 [국민회 쟝뎡]. 에 있음을 목적으로 한 국민회에는 1903·4년이래 하와이와 미주 본토에서 결성되어 당시까지 활동하던 한인 단체들의 대부분이 참여하였다. 하와이에서는 이미 1907년 7월 국내에서 이른바 정미신조약이 체결된 직후, 일제의 국권침탈에 대항하기 위해 그 직후인 9월 2일 24개 단체가 합동하여 한인합성협회를 결성하고 있었다.) 공립신보 1907년 9월 20일자 잡보 [깃분소식] ; 김원용, 재미한인오십년사, 캘리포니아, 1959, pp.95-97. 그에 비하여 미주에서는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가 경쟁적이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대립하기도 하여, 교포사회에서 그러한 관계를 우려하는 여론도 적지 않았었다. 두 단체의 목적이 동일하고, 교포의 수가 적으며, 인재와 재정이 부족하기 때문에 분립된 단체로는 계속 유지되기가 어렵다는 입장에서 통합이 주장되었고, 아울러 통합은 재정과 인력의 확대와, 세력의 확대를 가져올 수 있다는 현실적인 이점이 지적된 바 있었다.) 大同公報 1908년 1월 2일자와 공립신보 1907년 12월 6일자 기서 [미쥬 한인샤회  합동汰汶 의견셔]. 이 두 단체의 통합은 결국 대동보국회가 공립협회가 참여한 국민회에 1910년 2월 10일에 동참하여 대한인국민회로 개칭되며 마무리되었다. 이미 국민회는 이 때 미주 본토와 하와이뿐 아니라 멕시코, 노령과 만주 일대의 한인 단체를 망라하는 재외 교포 단일단체가 된 상태였다. 대한인국민회는 국민회의 장정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주요 임원을 국민회와 대동보국회 지도부들이 나누어 맡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대한인국민회는 미주 본토와 하와이, 멕시코, 그리고 노령과 만주를 포함하는 원동지방까지를 망라하는 교포 단일단체로 발전할 수 있었다.) 金度勳, [1910년대 초반 미주한인의 임시정부 건설론], pp.247-255 참조. 국민회는 1909년 2월 이후부터 그 [장정]에 해외 한인을 관장할 최고기관으로 중앙총회의 설립을 규정하였다.) 신한민보 1909년 3월 24일자 [國民會章程 脫稿] 및 1909년 3월 31일자 [國民會章程]. 물론 현실적으로 중앙총회를 조직하지는 못하고 북미지방총회에서 대리하여 활동하는 수준이었다.국민회나 이를 계승한 대한인국민회는 중앙총회-지방총회-지방회의 단계별 조직을 설치하게 되어 있었다. 그것이민주적 절차를 존중한 체제였음도 특기할 만하다. 따라서 국민회에서는 해외 한인의 최고 통일기관으로 중앙총회의 결성을 시급하게 생각하였는데, 1909년 10월 9일 국민회 임시 중앙총회에서 중앙총회의 조직이 촉구되자,) 신한민보 1909년 10월 13일자 [國民會報]. 북미와 하와이의 지방총회에서는 1910년 1월 6일 국권회복의 거점으로 국내에 인접한 만주나 노령지역을 중시하여 원동지역에 중앙총회 설립을 결의하였다.) 신한민보 1910년 1월 26일자 [북미지방총회보]. 그러나 이 계획은 당시 노령 한인사회의 분열로 더 이상 논의되지 못하였고, 국민회가 대동보국회를 통합하자 회명을 대한인국민회로 개칭하여 해외 한인의 최고기관임을 선포하였다. 더욱이 1910년 6월경 일제의 '합방론'이 알려지자 대한인국민회는 황제를 부인하며 새로운 정부수립을 천명한 바 있었다.) 신한민보 1910년 7월 6일자 논설 [噫死而不知其痛乎]. 이미 신민회에서 공화정을 내세우고 공립협회에서도 국민국가를 논의한 바 있던 점을 고려한다면,) [大韓新民會趣旨書]·[大韓新民會通用章程], 統監府文書 6, 국사편찬위원회, 1999, pp.58-61; 공립신보 1908년 12월 9일자 논설 [국민론]. 미국 헌법체계의 영향을 받았을 미주 한인들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대한제국이 1910년 8월 일제에게 강점 당하자, 대한인국민회는 9월 국민국가 건설을 강조하며 그 역할을 맡을 중앙총회 설립을 촉구하였으며,) 신한민보 1910년 9월 28일자 잡보 [듕앙총회 표원]. 신한민보는 1910년 10월 5일자 논설 [大韓人의 自治機關]이란 논설을 통해 대한인국민회를 해외 최고기관에서 임시정부로 설립하자는 견해를 내세웠다. 신한민보는 대한인국민회를 '국가인민을 대표하는 총기관'인 '假政府'로 설립하여, 입법·사법·행정 등 3권 분립에 의한 자치제도를 실시하며, 병역과 납세의 의무를 부여하자고 주장하였다. '가정부'는 결국 임시정부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대한인국민회는 그러한 여망에 따라 해외한인의 통일기관이자 임시정부인 중앙총회 설립에 노력하여, 1911년 3월에 중앙총회를 설립할 수 있었으나 중앙총회장 최정익과 부회장 한재명을 선출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신한민보 1911년 3월 29일자 [중앙총회보]. 이러한 상황에서 신한민보의 주필로 있던 박용만은 신문을 통하여 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하고 있었다. "무형 국가를 나 셩립케 고져"을 내세운 그는 대한인국민회를 정치조직인 무형국가로 건설하고 조선 독립을 위해서는 무형한 국가를 먼저 설립할 것과 해외 한인을 통일하고 결속시키기 위해 먼저 헌법을 제정하고 대한인국민회를 무형국가 또는 임시정부로 개편할 것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 과정과 내용에 관해서는 方善柱, [朴容萬評傳]과 金度勳, [1910년대 초반 미주한인의 임시정부 건설론]에 상세하다. 1911년 11월 23일부터 12월 4일까지 대한인국민회 북미 지방총회에서는 대의회를 개최하여, 그 기관지인 신한민보를 중앙총회에 양여하여 대한인국민회의 총기관지 삼는 등 여러 현안을 의결하였다.) 신한민보 1911년 12월 11일자 [금번  의회 의결안]. 그 결과 중앙총회에서는 1912년 2월 15일 대표원 회의를 열어 만주리아지방 총회와 시베리아 지방총회를 정식으로 인준하는 등 조직을 정비하였고,) 신한민보 1912년 3월 18일자 [중앙총회]. 각 지방총회에 대의원을 선임케 하여 11월 8일부터 29일까지 20여 일에 걸쳐 입법회의인 중앙총회 대표원 의회를 처음으로 개최할 수 있었다.) 신한민보 1912년 11월 4일자 논설 [중앙의회 소집]. 중앙총회 대표원 의회 결과, [장정]을 수정한 [헌장]의 제정을 비롯하여 국사의 편찬과 교과서의 제정, 會旗의 제정 등과, 미주와 하와이 두 지방총회의 기관지를 중앙총회에 양여하는 문제 등이 의결되었다.) 신한민보 1912년 12월 9일자 잡보 [ 표회 의 쵸록]. 11월 20일자로 박용만이 기초한 [중앙총회 결성 선포문]이 발표되었는데, 여기에서는 ……대한인국민회가 중앙총회를 세우고 해외 한인을 대표하여 일할 계제에 임하였으니 형질상 대한제국은 이미 망하였으나 정신상 민주주의 국가는 바야흐로 발흥되며 그 희망이 가장 깊은 이 때에 일반동포는 중앙총회에 대하여 일심 후원이 있기를 믿는 바이다 (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해외 한인의 최고기관으로 인정하고 자치제도를 실시할 것 (二) 각지에 있는 해외 동포는 대한인국민회의 지도를 받을 의무가 있으며 대한인국민회는 일반 동포에게 의무 이행을 장려할 책임을 갖을 것 (三) 금후에는 대한인국민회에 입회금이나 회비가 없을 것이고 해외 동포는 어느 곳에 있던지 그 지방 경제형편에 의하여 지정되는 의무금을 대한인국민회로 보낼 것이다.) 김원용, 재미한인오십년사, pp.108-109. 라고 하여, 대한인국민회의위치와 역할을 다시금 규정하였던 것이다. 1909년 2월에 결성된 국민회는 미주 본토와 하와이뿐 아니라, 노령과 만주를 포함하는 원동지역까지 지방총회가 설치되는 등, 해외 한인의 대표기관의 역할을 해오고 있었다. 1910년 2월 대한인국민회로 개편된 이후에는 그 최고기관인 중앙총회의 설립에 노력을 경주하여, 대한제국이 국권을 일제에게 강탈당한 이후 임시정부 형태의 중앙총회를 1912년 12월에는 설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이 사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완전한 형태가 될 수는 없었으나, 대표기관으로서 규정되었다. 특히 중앙총회-지방총회-지방회의 구성에서 임원의 구성이 회장·부회장·총무·서기·재무·학무원·법무원은 모두 같으나, 중앙총회에는 외교원이, 지방총회와 지방회는 구제원이 설치된 것에 차이가 있었다.) 大韓人國民會憲章,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1913; 島山安昌浩全集 5, 島山安昌浩先生紀念事業會, 2000, pp.549-552. 즉 중앙총회는 지방총회와는 달리 외교문제를 담당하고자 하였던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3. 대한인국민회와 안창호

1911년 9월에 미국에 도착한 안창호는 11월에 대한인국민회 상항지방회의 대의원으로 11월 23일부터 12월 4일까지 개최된 대한인국민회 북미 지방총회 대의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신한민보 1911년 11월 20일자 잡보 [총회장급 ], 12월 12월 11일자 잡보 [금번의회의 결안]. 그리고 1912년 1월 북미 지방총회의 순행위원으로 각지에 특파되었으며,) 신한민보 1912년 1월 29일자 [會報], 6월 24일 잡보 [안리 량씨의 순 위문]. 만주리아 지방총회의 대표원으로 계속 선임되었다.) 신한민보 1912년 7월 1일자 [中央總會報抄錄], 11월 4일자 [中央總會報]. 따라서 1912년 11월 8일부터 개최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대표원 의회에도 그는 만주리아 지방총회의 대표대리로 참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안창호가 미국을 떠나 있을 때에도 대한인국민회와 지속적인 관련을 맺고 있었음을 알려준다고 하겠다. 사실 그는 국민회의 한 전신인 공립협회의 초대 회장이었으며, 1910년 4월 망명한 이후에도 만주와 노령의 국민회 지방회 창설에 크게 관여한 바 있었다.) 李明花, [1910년대 재러 한인사회와 大韓人國民會의 민족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1, 1997. 대한인국민회가 해외 한인의 최고기관으로, 그 중앙총회를 설치하여 임시정부를 대신하는 무형정부의 역할을 자임하게 되는 데에는 박용만의 지속적인 활동이 가장 두드러졌다. 그와 더불어 안창호역시 일정한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1911년 11월에 개최된 대한인국민회 북미 지방총회의 대의회에서 안창호는 상항지방회의 대의원으로 참석하여 강번과 총회 세칙기초위원에 선정되었으며,) 신한민보 1911년 12월 11일자 [금번의회 의결안]. 1912년 11월의 중앙총회 대표원 의회에서는 국민회 장정을 수정하여 헌장 76조목을 제정할 헌장수정위원으로 박용만·박상하와 함께 선임되었던 것이다.) 신한민보 1912년 12월 9일자 잡보 [ 표회 의 쵸록]. 즉 안창호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위상과 성격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두 차례의 모임에서 1909년에 만들어진 [국민회장정]을 수정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고, 특히 헌장수정위원으로 박용만과 함께 활동하였다는 사실은 [국민회장정]의 수정에 전권을 가졌다는 의미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1912년 11월 중앙총회 대의원 의회에서 북미 지방총회의 대표로 중앙총회장 선거에 나선 안창호는 경합한 윤병구에게 낙선하고 말았다.) 신한민보 1912년 12월 9일자 잡보 [ 표회 의 쵸록]. 아마도 초대 중앙총회장 최정익이 미주 본토에서 활동한 인물이었으므로, 제2대 총회장은 하와이를 대표하는 윤병구에게 돌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方善柱,[朴容萬評傳], p.77. 사실 안창호는 미주에 도착한 이후 대의원이나 순행위원 등으로 대한인국민회 활동에도적극 참여하였지만, 김인수 등과 북미실업주식회사의 설립과 그 주주 모집에 진력하고 있었다. 1912년 1월캘리포니아 지역의 동포들을 중심으로 농장을 경영하여 이익을 도모하는 북미실업주식회사가 발기되었다.) 신한민보 1912년 1월 29일자 논설 [賀北美實業株式會社], 잡보 [북미실업두식회샤발긔]. 발기인은 송종익·김종혁·조성환·김기만·정원도·임준기·손양선·강번·안창호였다([北美實業두식회사 株式擔當證書], 島山安昌浩全集 5, p.630). 안창호가 회사 발기에 앞서 자주 동포들을 순방한 것도 이 회사의 발기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한민보 1911년 12월 11일자 잡보 [안씨의 지방순 ]. 특히 안창호가 스탁톤으로 향발하였다는 기사를 참고하면, 바로 농장 경영과 관련된 일이었다(신한민보 1911년 12월 25일자 잡보 [안시왕환]). 스탁톤 근처에 북미실업주식회사의 농장이 준비되었던 것이다(신한민보 1912년 12월 9일자 [북미실업회샤광고]). 1912년 말 스탁톤 농장의 감자농사가 실패하였으나,) 신한민보 1912년 12월 9일자 [북미실업회샤광고]. 1913년 7월에는 정봉규 등의 투자로 오히려 자본금이 증가하는 등 궤도에 올랐으며,) 신한민보 1913년 10월 10일자 잡보 [북미실업회사의 발흥], [뎡씨의 근면과 담력]. 특히 사장 맹정희는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진력하였다.) 신한민보 1914년 8월 13일자 잡보 [ 씨의 큰 계획]. 안창호가 북미실업회사의 발기에 진력한 것은 독립운동의 한 단계로 실업발전을 이해하면서, 동시에 재미 교포들의 자립을 이루기 위한 방안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안창호는 흥사단의 창립을 준비하였다. 務實·力行·忠義·勇敢을 강령으로 삼은 흥사단에 앞서 그는 이미 1909년 8월 국내에서 인격수양과 애국심 함양을 위한 청년수양단체로 청년학우회를 설립한 바 있었다. 청년학우회는 懋實·力行·自彊·忠實·勤勉·整齊·勇敢을 강령으로 하여, 덕육·체육·지육을 훈련방법으로 제시하였는데,) 청년학우회의 전반에 관해서는 愼鏞廈, [新民會의 創建과 그 國權恢復運動], 韓國民族獨立運動史硏究, 乙酉文化社, 1985, pp.91-100 참조. 미국에서 설립된 동맹수련단체인 흥사단의 강령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흥사단은 1913년 5월 務實力行·健全人格·團結訓練·國民皆業 등을 목표로 설립되었다.) 흥사단이라는 단체는 유길준이 1907년 11월 국내에서 설립한 것이었는데(尹炳喜, [兪吉濬의 興士團 運營], 國史館論叢 23, 1991), 안창호는 그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흥사단에 관해서는 박현환 편, 흥사단운동, 大成文化社, 1955와 흥사단 50년사, 大成文化社, 1964 및 흥사단 운동 70년사, 흥사단출판부, 1986를 참고할 것. 다만 흥사단의 조직과 활동은 대외적으로 널리 알리지 않았는데, 그것은 1910년대 신한민보에 흥사단에 관한 기사가 거의 보이지 않은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1911년부터 1914년까지 안창호는 대한인국민회의 활동과 더불어, 북미실업주식회사와 흥사단의 설립에 진력하고 있었다. 대한인국민회 제2대 중앙총회장 윤병구는 목사로 총회장으로서의 활동보다 미국 기독교계에 한국의 정치상황이나 기독교를 알리는 활동이 더욱 두드러졌다.) 신한민보 1913년 7월 18일자 잡보 [윤씨참셕], 10월 17일자 잡보 [윤씨의 경세웅병]. 그는부득이한 사정을 이유로 1914년 3월 사면을 요청, 사임하였는데,) 신한민보 1914년 3월 12일자 잡보 [듕앙춍댱 사면쳥원], 3월 19일자 잡보 [듕앙춍회댱 임]. 혹 그것이 오레곤주에 거주하다가 워싱턴으로 이주한 것과 관련이 있을는지 모르겠다.) 신한민보 1914년 11월 19일자 잡보 [윤씨참쳑]에 따르면 그가 "와 톤도 썸너"에 거주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대한인국민회는 중앙총회장의 사임으로 부회장 황사용이 대리하는 상황이 되었다. 1914년 11월 대한인국민회 대표원회에서는 중앙총회장 후보로 안창호와 백일규, 부회장 후보로 박용만과 홍언을 내세웠고,) 신한민보 1914년 11월 26일자 잡보 [듕앙총회후보쟈]. 1915년 2월 시베리아 지방총회의 투표보고가 없었으나 안창호와 박용만이 압도적으로 당선되었으며,) 신한민보 1915년 2월 11일자 잡보 [듕앙총회 총부회댱투표]. 4월 2일 이들의 당선을 정식으로 공고하였다.) 신한민보 1915년 4월 22일자 잡보 [듕앙총회댱선거공포]. 안창호는 6월 23일 중앙총회장 취임식에서, 지방총회 중심의 대한인국민회의 폐단을 지적하며 중앙총회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야 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신문도 미주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가 발행되고 있으나, 중앙총회에 1개의 기관지를 두는 것이 유리하다고 밝혔다.) 신한민보 1915년 7월 8일자 논설 [듕앙총회댱 연셜대지]. 신한민보의 경우, 1911년 11월 북미 지방총회 대의회에서 중앙총회의 기관지로 양여한다는 결의를 하였으나, 실제로는 북미 지방총회에서 계속 발행하고 있었다. 대한인국민회는 최고기관으로 중앙총회를 설치하였지만, 지역적으로 미주 본토와 하와이가 별개의 지역권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지방총회 단위의 활동이 활발하였다. 사업의 집행주체가 지방총회였기 때문인지, 중앙총회가 직접 관여하는 사업도 많지 않았다. 그리고 원동지역은 현실적으로 중앙총회가 관여할 수 있지 못하였다. 북미 지방총회는 1914년 4월 4일자로 캘리포니아주 정부의 인허를 요청하여 4월 6일자로 관허를 받았는데,) 신한민보 1914년 4월 9일자 잡보 [북미춍회 관허인가]. 그것은 캘리포니아주 정부를 상대로 하여 재미 교포의 대표성을 획득한 것이었다. 중앙총회가 배제되어 있던 것으로 보아, 중앙총회가 맡을 외교문제로 인식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안창호가 중앙총회장이 되었지만, 지방총회 중심의 대한인국민회 운영은 달라지지 않았다. 안창호가 규정상 임기종료를 앞둔 1917년 2월 9일자로 대표원회에 보낸 공문에서 "귀  표회는 왕자에 즁앙총회 임원 승낙 요구를 답복지 안이하야 二 년간 우리 즁총으로 하여금 한갓 빈 일흠만 가지고 잇게 하얏고"라고 지적란 것으로 미루어,) 신한민보 1917년 2월 15일자 [즁총공독쵸록]. 이 시기에는 임원진이 구성조차 되지 못하였음이 확인된다. 따라서 중앙총회를 중심으로 대한인국민회를 해외 한인의 최고기관으로, 나아가 임시정부의 형태로 발전시키고자 하였던 안창호의 생각은 현실적으로 별다른 진전을 볼 수 없었다. 중앙총회장으로 3년여가 지난 1918년 8월에 이르러서도 안창호가 느끼는 중앙총회의 현실은 비관적이었다. 우리 국민회의 듕앙총회는 조직 이후 우금 허명에 존 하고 실디에 나아가지 못함은 우리의 일반  탄하난 바라  가 본시 허명의 임무를 고 잇기를 즐겨하지 안이하나 장차 실디에 나아가기를 바라고 란연히 허위에 안져 잇셧도다 그러한 지 량년에 아직도 시긔가 허락지 안이하고 더욱  능이 부죡하야 허명의 일이라도 전일에 비하야 퇴보가 되엇스니 스사로 참숑함을 닷지 못하노라 그러나  표원 졔공은 과거와 현 에 의지하야 우리 듕총을 비판에 두지 말고 이로브터 션하야 실디에 나아가기를 도모하면 우리  외 동포의 대동단결하난 그날이 잇슬지니 깁히 바라건 ……우리 듕앙총의 부의 긔강을 발오 잡아 젼도의 업무를 진흥함을 간졀히 바라옴) 신한민보 1917년 8월 23일자 [즁앙총회 공독쵸록]. '해외 동포의 대동단결'을 목표로 삼고 있는 중앙총회의 현실이 이름만 있을 뿐, 아무런 실천도 할 수 없다는 점을 밝히고 있던 것이다. 물론 북미 지방총회의 다양한 사업과 활동 역시 중앙총회와 무관하게 이해할 것은 아니었다. 북미총회가 1913년 6월 교포들이 일본인으로 오인되어 축출당한 사건을 계기로 미국 국무장관에게 한국인과 일본인의 분별 대우를 요청하자, 국무장관은 이를 인정한 바 있었다.) 신한민보 1913년 7월 4일자 전보 [뿌라연의 명령으로 헤밋 한인의 사건을 정지]. 이후 미국 이민국이 대한인국민회를 한국 정부를 대신한 것으로 인정하여, 한국인이 국민회의 증서와 담보만으로도 입국이 가능하였다.) 신한민보 1913년 9월 12일자 논설 [국민의 의무와 권리]. 교포들의 권익을 위한 이러한 노력은 북미 지방총회가 앞장섰는데, 중앙총회의 고유권한인 외교문제로 인식하지 않은 것인지 무시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따라서 교포들을 권익을 위한 사업은 현실적으로 북미 지방총회가 그 주체였다. 아마도 안창호는 중앙총회의 활동범위를 지방총회의 수준을 넘어서서 해외 교포 전체를 대상으로 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중앙총회가 이름만 있을 뿐, 실제 활동에 있어 아무런 권한과 재정을 지니지 못하고 있었다. 1917년 6월 나성지방회가 주최한 졸업생 축하회에서 안창호가, " 가 국민회 즁앙총회쟝의 직무를 밧아 가지고 오날 지 이 직무를  고 잇난 것은 허명이나마 업셔질가 두려워함이니 여러분은 '우리의 힘'을 발육하랴거든 즁앙총회를 오 동안 허위에 두지 말고 실졔에 두시오"라고 한 것도,) 신한민보 1917년 7월 12일자 [안창호씨의 연셜]. 중앙총회가 재정이 없어 교육에 관심을 두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었다. 뿐만 아니라 안창호가 북미실업주식회사나 흥사단에 관여하는 것을 그 자신의 세력확대로 보는 여론도 없지 않았다.) 島山安昌浩全集 1, p.321(안창호가 홍언에게 보낸 편지, 1918년 4월 17일자)에는, ……世人中 나를 가라쳐 某團某社  自己가 創立한 것이닛  거여혀 勢力을 기르랴  野心이라고 하  이가 잇지만  弟  나의 너의 創立를 分間함도 안니오 此와 彼을 分別함도 안니라 다만 國家를 前提로 삼아셔 이러케 이러케 하여야 國家 將來에 有利하겟다  自覺에 一念 이외다 國民會를 唱道한 者 中 弟도 하나히라 웨 共共固的 機關이 잇셔야 하겟다 함이오 興士團도 發起者中 弟 亦 一人이라 웨 修養的 精神機關이 잇셔야 必要하겟다 함이오 北社도 主唱者中 弟 亦 一人이라 吾人의 生活力를 增進케 하여야 하겟다 함이라…… 고 그에 대한 일부 부정적의 여론에 대한 심경의 일단이 엿보인다. 중앙총회의 재외 한인 최고기관으로서의 위상은 사실 1914년 7월 만주리아 지방총회가 해체되고, 1915년 5월 시베리아 지방총회가 폐지되었을 때부터 약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원용, 재미한인오십년사, pp.109-110. 지방총회로 유지된 것은 북미와 하와이 두 곳이었는데, 하와이 지방총회는 1914·5년경부터 비롯된 박용만 지지세력과 이승만 지지세력의 대립으로 내분에 휩싸여 있었다. 그렇다면 북미 지방총회만이 중앙총회와 직접 연계되는데, 권한과 재정이 여의치 않은 중앙총회의 위상이 제대로 설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도 중앙총회장으로 안창호의 활동은 각 지역 지방회를 순방하는 것에 집중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는 1915년 8월, 하와이에서 벌어진 박용만 지지세력과 이승만 지지세력의 내분을 중재하기 위하여 3개월 여 하와이를 순방하였다.) 신한민보 1915년 9월 30일자, 10월 14·28일자 [듕앙총회댱쇼식], 11월 11일자 [듕앙총회댱 마위 ], 12월 9일자 [즁앙총회쟝 슌 과 회뎡]·[즁앙총쟝슌 후문]. 하와이 순방은 이승만이 안창호의 면담을 거부하고 타지로 이동함으로써 중재에 실패하고, 주로 교민들에게 애국심과 민족정신을 고양하는 연설을 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1917년 10월 중앙총회장 자격으로 안창호는 멕시코 여러 곳에 설립된 지방회를 순방하기 위하여 10개월에 걸친 여정에 나섰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배편으로 멕시코로 간 그는 메리나에 주로 머물며 각지의 동포들을 순방하였는데,) 신한민보 1917년 11월 22일자 [묵경디방회는 듕앙춍회댱을 환영], 12월 27일자 잡보 [듕앙춍회댱을 환영], 1918년 3월 14일자 [메리다의 긔념경츅], 6월 13일자 [듕앙춍회댱 안창호씨의 쇼식], 7월 11일자 [듕앙총회댱 젼별회], 9월 5일자 [듕앙춍회댱 환착]; 이자경, 한국인 멕시코 이민사, 지식산업사, 1998, pp.359-364. 열악한 동포들의 생활상을 목격하였고, 교육과 실업의 발전을 위해 교민 계몽과 북미실업주식회사와의 연계를 도모하였다.) 島山安昌浩全集 1, pp.316-322에 수록된 안창호가 홍언에게 보낸 편지(1918년 4월 17일자). 안창호는 하와이 순방에서 교민들의 대립과 갈등을 목격하고, 그러한 상황을 불건전한 공동주의가 불건전한 개인주의를 가져왔다고 파악하였다.) 신한민보 1916년 6월 22일자 [즁앙총회댱 해외한인의 쥬의를 보신 것]. 사실 안창호는 대한인국민회를 미주와 하와이에 국한시켜서는 안되고, 노령이나 만주를 포함하는 원동지역까지 확대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재미 한인만의 단결으로는 그 목적을 이룰 수 없으므로, 해외 한인 전체의 대동단결을 기대하였던 것이다.) 신한민보 1916년 2월 22일자 [우리 국민의 진화의 슌셔]. 이러한 마당에 하와이에서의 분쟁은 재미 한인의 단결조차 쉽지 않은 현실을 보여준 일이었고, 안창호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건전한 개인주의와 공동주의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북미 지방총회 당국이 이후 이승만과 박용만의 내분을 해결하고자 지속적으로 노력하였으나, 오히려 북미 지방총회와 하와이 지방총회의 갈등으로까지 번져나갔다. 결국 이러한 내분은 대한인국민회 전체의 침체를 가져왔고, 그 활동범위도 축소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와이 지방총회 문제에 관해서는 洪善杓, [1910年代 後半 하와이 韓人社會의 動向과 大韓人國民會의 活動], 한국독립운동사연구 8, 1994 참조. 안창호가 대한인국민회와 같은 정치·사회단체와 별도로 흥사단을 유지하고자 한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대한인국민회의 [장정]에 따르면 중앙총회장의 임기는 2년이었다. 그 임기가 종료되는 시기에까지 신임 총부회장 선거에 관한 논의가 없자, 안창호는 중앙총회 부회장으로 대표회 의장을 겸하는 박용만에게 1917년 2월 9일자로 조속히 선거를 위한 준비를 촉구하였다.) 신한민보 1917년 2월 15일자 [즁총공독쵸록]. 그러나 이에 대한 대표원회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자 8월 8일에는 임시 대표원회 의장의 선거를 촉구하였고,) 신한민보 1917년 8월 23일자 [즁앙총회 공독쵸록]. 결국 1918년 6월 13일에 이르러서야 임시 의장이 선출되어 중앙총회 총부회장 선거를 준비할 수 있었지만,) 신한민보 1918년 6월 20일자 [즁앙춍회보 쵸록]. 11월 25일 중앙총회장 안창호에 의하여 대표원회가 소집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총부회장 선출문제 때문이 아니라 시국문제, 즉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의 휴전이 성립되자 파리 평화회의와 그 해 12월 뉴욕에서 예정된 소약국민동맹회에 대표를 파견하는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였다.) 신한민보 1918년 111월 21일자 잡보 [듕앙총회  표원회 소집], 11월 26일자 잡보 [듕앙총회시국문뎨], 11월 28일자 호외. 이후 시국문제 곧 외교문제는 중앙총회가 주도하면서, 중앙총회장 안창호가 선두에 나서고 모든 대외관계도 중앙총회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안창호가 소약국민동맹회 파견대표인 민찬호·정한경에게 쓴 편지에서, "外交權은 中央總會에만 有耽 地方總會 지도 無榻 此는 國民會 憲章이라"고 한 것으로 짐작되듯이,) 島山安昌浩全集 1, p.328(안창호가 민찬호·정한경에게 보낸 편지, 1918년 12월 15일자). 외교문제는 중앙총회의 소관이었다. 1919년 1월 4일에 열린 임시국민대회도 중앙총회의 소집으로 이루어졌으며,) 신한민보 1919년 1월 23일자 호외. 안창호는 다시금 북미·하와이·원동지역의 대동단결을 강조하였다.) 신한민보 1919년 3월 6일자 잡보 [듕앙총회댱의  착]. 외교문제의 처리를 중앙총회의 소관사무로 한 규정이 발휘된 것이지만, 동시에 북미나 하와이의 지방총회 단위보다는 명목적이라도 그 상위 최고기관인 중앙총회의 명칭이 중시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해외 한인사회에서의 중앙총회장 안창호가 지닌 명성이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중앙총회는 집행부와 별도의 재정을 지니지 못하였으나, 각 지방총회의 대표원들로 구성된 일종의 의회를 갖춘 대표성을 확보한 최고기구였다. 따라서 평화회의와 소약국민동맹회의 대표 파견문제와 같은 외교문제를 중앙총회의 소관업무로 규정하였던 것이다. 물론 평화회의 대표로 정한경만이 선임된 데에 대한 불만과 같이 그 결정사항에 대한 부분적인 불만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洪善杓, [1910年代 後半 하와이 韓人社會의 動向과 大韓人國民會의 活動], p.174. 그간 중앙총회 및 북미 지방총회와 갈등을 보여온 하와이 지방총회에서도 중앙총회를 전반적으로 지지하며 그 지시를 따르겠다고 나섰다. 예컨대 하와이 지방총회장 안현경이 중앙총회에 보내온 공문에서, "이번 사건은 듕앙총회로서 전권집 하난 것이 합당한 일이올시다.  졍은 엇더케 모집하야 쓰난지 그 방법을 알기 원하오며, 하와이 총회는 듕앙총회의 지휘 아래 대사 진 을 도울터이올시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신한민보 1919년 1월 23일자 호외. 1919년 3·1운동을 전후하여 중앙총회는 미주 동포들에게 의연금 모집을 포고하고,) 신한민보 1919년 3월 29일자 [독립의연모집규뎡]. 각 지역에 특별위원을 파견하였다. 또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된 김규식 등 대표단의 소요경비 3,500달러를 송부하였으며, 안창호도 4월 1일 중앙총회에서 모금한 6,000달러를 휴대하고 상해로 출발하였다.) 李明花, [中國에서의 安昌浩의 獨立運動연구(1919-1932)], 홍익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00, pp.18-19.

4. 맺는말

안창호는 1911년 9월 미국에 도착하여 대한인국민회를 해외 한인의 최고기관으로 만들기 위하여 중앙총회를 조직하는 일에 진력하며, 동시에 북미실업주식회사와 흥사단의 설립을 위한 노력도 계속하였다. 1914년까지 안창호는 대한인국민회의 대의원·순행위원·헌장수정위원 등의 직임을 맡아 일하였으며, 1915년에는 4월 중앙총회 제3대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1919년 4월 중국으로 떠나기까지 재임하였다. 따라서 7년 반이나 되는 그의 제2차 도미시기는 대한인국민회와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그는 대한인국민회를 임시정부 형태로 해외 한인 최고기관의 역할을 기대하였으나, 1914·5년에 원동지역이 제외되고 하와이 지역이 분규에 빠지면서 오히려 지방총회에도 미치지 못하는 역할을 목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앙총회는 실제 권한과 재정이 결여되어 있었고, 특히 북미 지방총회의 여러 사업으로 그 존재조차 드러나기 어려웠다. 1918년까지 안창호는 중앙총회장으로 하와이와 멕시코를 1년 넘게 순방하였을 뿐, 집행부조차 구성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며 파리 평화회의와 약소국민동맹회가 개최되게 되자, 중앙총회는 외교문제를 전담하며 북미와 하와이 지방총회의 상위기관으로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외교문제는 중앙총회의 소관사항이었기 때문이었다. 신한민보에 1919년 4월경부터 [中央總會廣告]난이 신설되는 것만으로도 그러한 위상의 변화가 짐작된다. 그러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1922년 1월 4일에 해체되었다. 이승만이 파쟁으로 하와이 지방총회를 장악하고 중앙총회와 연락을 끊었던 혼란과, 임시대통령으로 권력투쟁을 일으킨 분열이 심하여 재미한인 사회단체의 연립제도가 파괴된 까닭이었다고 한다.) 김원용, 재미한인오십년사, p.110. 이승만은 그 지지자들로 하여금 1921년 3월 하와이 지방총회를 교민단으로 변경시켰던 것이다. 북미 지방총회만이 대한인국민회로 존재하게 되면서, 중앙총회는 불필요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결국 중앙총회는 약 10년간 유지되었으나, 해외 한인의 최고기관으로의 역할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해외 한인들의 분열과 대립으로 폐지되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 이전에 그러한 기능과 역할을 기대한 해외 한인의 염원이 담긴 기관이었던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 안창호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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